한국의 예술가들과 그 초상의 의미 - 윤진섭 (미술평론가) (2010년)

박철 0 3,282

한국의 예술가들과 그 초상의 의미

 

미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낸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은 “사람이 나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했다. 마흔이면 공자가 말한 불혹(不惑)의 나이다. 삼십에 우뚝 서 인생을 설계하고 마흔에 이르러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그 인생은 절반은 성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말했듯이 삶은 ‘깨지기 쉬운(fragile)’ 것, 그 누구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섹스피어의 주옥같은 희곡들은 그런 삶의 요체를 우리들에게 알려줌과 동시에 인생에 관한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박철이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한국의 예술계에서 각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시인과 수필가(고(故) 피천득, 고(故) 법정, 김지하, 이해인, 김후란)를 비롯하여 무용가(김문숙, 이숙재, 정재만, 김숙자, 박명숙), 연극배우(손숙, 김혜자), 연극연출가(김정옥, 정진수, 이상희, 최치림), 피아니스트와 성악가(이승희, 김형규, 박종훈), 화가와 조각가(김영원, 이석주) 등이 망라된 대상을 보면 마치 축소된 한국의 예술계를 보는 것 같다. 그만큼 대상의 선정에 고심을 한 흔적이 역력하며, 이들의 얼굴을 통해 “예술가들의 초상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안고 그림을 그린 작가의 고뇌가 엿보인다.

 박철은 원래 인물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가 아니다. 30여 년을 오로지 한지작업에 몰두해온 미술계의 중진작가다. 우리의 전통기와나 멍석을 비롯하여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를 소재로 한지를 이용한 고유의 부조회화를 개척한 작가다. 그런 그가 뒤늦게 인물화를 시도하는 이유는 옛날에 그려본 적이 있는 드로잉이 새삼 그리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화단 풍토는 하나를 인정하면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가 붓을 든 이유는 단순히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열망에 기인한다. 예술이 본디 자유로운 것인데 왜 표현의 욕구를 스스로 억제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이번 전시의 이유 가운데 하나다. 

 박철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예술가들의 직업에 따라 고유의 개성이 어떻게 얼굴에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작품 제작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예술가의 개성과 인간적 내음을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 거친 회화적 터치를 구사하는 가운데 각 개인의 특징을 포착한다. 그가 그린 22점의 초상화는 갈색과 녹색의 단색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같은 화풍이라 하더라도 인물마다 서로 다른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황토색, 황갈색, 짙은 갈색, 녹색을 사용해 단색조로 표현한 이 그림들은 대상의 직업이나 개성에 따라 색조와 터치를 달리 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사진을 보고 그린 이 초상화들은 말하자면 사진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이랄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가의 기량과 재주, 그리고 안목에 달렸다. 

 이번 초상화 제작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법은 캔버스 바탕을 나이프로 처리, 매끄러운 질감을 조성한 뒤 그 위에 중간 크기의 붓과 작은 붓을 사용하여 인물을 묘사한 것이다. 아사천의 소박한 질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여백을 남긴 것과 단색조로 일관한 것도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다. 

 박철의 초상화는 대상을 깊이 파지 않고 드로잉처럼 시원하게 처리한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대개의 경우 머리와 목 부근의 옷자락을 붓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대담한 터치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초상화는 어떤 경우든 대상이 되는 인물의 인생관이 제대로 드러나야 잘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살 하나, 표정, 눈빛, 그리고 전체적인 느낌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 하는 점을 조감해 줄 때 우리는 초상화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초상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단지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가려진 성정(性情)의 표현, 즉 전신사조(傳神寫照)를 통해 인물의 인격을 느끼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전래된 선조들의 많은 초상화들이 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박철이 제작한 <22인의 예술가, 그들의 표정전>의 출품작들이 우리 예술인들의 초상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 

 

-미술평론가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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